
중동 국가 중 가장 선명한 반미·반유대주의 노선을 견지해 온 이란은 미국·이스라엘이라는 두 적국으로부터 전례 없는 군사공격을 받았지만 대응은 무기력했다. 기간시설 파괴뿐 아니라 다수의 군 지도부와 핵개발 과학자들까지 살해당했는데도 상대방에게 별다른 군사적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주요 인사들의 동선 등 핵심 정보가 속속 새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에 대해 더 이상 이란을 중동의 맹주로 부를 수 없는 상태(뉴욕타임스)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지난 수십 년간 고립을 자처해 온 이란 국민은 당장은 외부 세력에 맞서 결집하는 국면이지만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분열 여론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9년 친서방 왕정이 무너지면서 수립된 이슬람 신정공화국 체제는 ‘장기 제재로 인한 경제난’,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피로감’, ‘중동 정세의 급변’ 등의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미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썩었다는 분석이다.
우선 핵개발로 단행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로 촉발된 생활고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 강도를 높여 이란의 위상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1979년부터 이란을 통치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원유와 천연가스 등 풍부한 자원 등을 앞세워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걸프 전쟁(1990~1991) 등의 격변을 견뎌냈다.
그러나 2002년 반정부 단체들이 이란 정부의 비밀 핵개발 사실을 폭로하면서 계속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로 정상적인 수출입 활동이 봉쇄되고 해외 자금이 동결되면서 경제난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중반 세계 18위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20위 수준으로 떨어지고 청년실업률이 20%를 웃돌 정도로 제재는 이란을 경제적으로 몰락시켰다. 경제난은 군사력 약화로도 이어졌다. 세계 군사력을 평가하는 글로벌파이어파워(GFP) 순위에서 2020년 이란은 14위로 이스라엘(18위)을 앞질렀다. 그러나 올해는 이스라엘이 15위, 이란은 16위로 역전됐다.
이에 따라 가중되는 생활고는 최근 몇 년 새 대통령 위에 종교지도자(최고지도자)가 군림하고 이슬람 율법이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이란 특유의 신정체제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정권 내부에도 체제에 불만을 가진 상당수의 인물이 이스라엘 등에 포섭돼 이중간첩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이란은 수도 테헤란의 비밀창고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핵개발 관련 문서 수만 쪽과 CD 183개를 도난당했는데, 이는 이 중 간첩들의 제보에 따른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란은 주요 인사들의 위치정보가 잇따라 유출되면서 혁명수비대 총사령관, 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과 부사령관을 비롯해 저명한 핵물리학자 등 주요 핵개발 인력 수십 명을 잃었다.
이란을 중동의 맹주로 떠받치던 저항의 축과 초승달 벨트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이란은 지역 내 영향력도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 저항의 축은 이란이 후원하던 중동 내 무장세력 하마스(팔레스타인), 헤즈볼라(레바논), 후티(예멘) 등을 말한다. 그런데 2023년 10월 하마스의 본토 기습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격퇴전에 나서면서 전선을 헤즈볼라 후티, 그리고 그들의 후원 세력인 이란으로까지 확대하면서 ‘저항의 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란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슬람 시아파 국가인 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일컫는 ‘초승달 벨트’도 사실상 와해됐다.